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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조은시와글

봄비에 관한시3

 

 

봄비              황동규

조그만 소리들이 자란다

누군가 계기를 한금 올리자

머뭇머뭇대던 는개 속이 환해진다

나의 무엇이 따뜻한지

땅이 속삭일 때다

는개 ㅡ 안개보다 조금 굵고 이슬비보다 가는 비

 

 

봄비는 가슴에 내리고      목필균

그대가 보낸 편지로

겨우내 마른 가슴이 젖어든다

 

봉긋이 피어오르던 꽃눈 속에

눈물이 스며들어, 아픈 사랑도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주리라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은

겨울 일기장 덮으며

흥건하게 적신 목련나무

환하게 꽃등 켜라고

온종일 봄비가 내린다

 

 

   봄비, 간이역에 서는 기차처럼      고미경(1965 - ) 충남 보령

간이역에 와 닿는

기차처럼 봄비가 오네

목을 빼고 오래도록 기다렸던

야윈 나무가 끝내는 눈시울 뜨거워져

몸마다 붉은 꽃망울 웅얼웅얼 터지네

나무의 몸과 봄비의 몸은

한나절이 지나도록

깊은 포옹을 풀지 못하네

어린 순들의 연초록 발바닥까지

스며드는 따스함으로 그렇게

천천히, 세상은 부드러워져갔네

 

숨가쁘게 달려만 가는 이들은

이런 사랑을 알지 못하리

가슴 안쪽에 간이역 하나

세우지 못한 사람은

그 누군가의 봄비가 되지 못하리

 

 

   봄비 내리는 일요일       김금용

길이 묘연하다

모퉁이를 돌자 언제부터 쫓아왔는지

봄비가 추적추적

일방통행 표지판을 지운다

뒤엉킨 수천 개의 전선 위에

빨간 신호등을 켠다

재개발한다는 어린 시절 골목

삼십 년을 살았어도 낯설어 길을 묻는다

매번 첫걸음은 설렘으로 숨이 찬다

어디쯤 왔는지 하늘은 보이지 않고

뒷등 보이며 재빨리 숨는

앞길은 이내 막다른 골목이다

우산 펴들고 길 더듬는 내 앞에

봄비는 성큼 팔짱을 낀다

혼자 나서지 못하고

왔던 길 자꾸 뒤돌아보는 미련함으로

 

 

   봄비 내리면         고재종

봄비 내리면

저 대그늘진 뒷마당의

층층 더께진 삼동얼음 녹으려나

 

봄비 내리면

저기 저 시퍼런 탱자울 너머

꿈결인 듯 유유히 앞강물도 푸릴려나

 

동네 한복판쯤에

두발 뻗고 퍼질러 앉아

딱 공딱!  되게 한번 먹이고

아이고 한울니 ㅡ임

목 넘기면

봄비 내리면

 

내 마음 속 자갈밭 귀영치에도

강파른 씨톨 하나 이윽고 눈을 떠서

이제는 하늘도 젖은 하늘 아래

저 둔덕 밑의 꽃다지며 황새냉이꽃

벌써 저렇게 차오르는 보리밭이랑

한번쯤 목메임으로 흐르려는가

 

 

 

 

 

   봄비 내린 뒤             이정록

개 밥그릇에

빗물이 고여 있다

흙먼지가

그 빗물 위에 떠 있다

혓바닥이 닿자

말갛게 자리를 비켜주는

먼지의 마음, 위로

통통 분 밥풀이

따라 나온다

찰보동 찰보동

맹물 넘어가는 저 아름다운 소리

뒷간 너머

개나리 꽃망울들이

노랗게 귀를 연다

밤늦게 빈집이 열린다

누운 채로 땅바닥에

꼬리를 치는 늙은 개

밥그릇에 다시

흙비 내린다

 

 

   봄비는 즐겁다            송수권

며칠째 봄비가 지난다

한 떼씩 마치 진군의 나팔 소리 같다

샤넬 향수병을 따놓은 병마개 같다

촉촉히 마음에 젖어 드는 얼굴

세상이 보기 싫다며 손나발을 입에 대고

불던 친구가 있었다

물구나무 서서 가랑이 사이로

세상을 건네보던 친구가 있었다

젖지도 못하고 마른 종이처럼 구겨졌으면 어쩌나

큰 길로 나서니 빨강 초록 파랑 우산 속에

소녀들의 밝은 표정이 갇혀 있다

한 떼의 봄비처럼 조잘 거리며 내를 건너 숲을 건너

밀림 속으로 사라져간다 저 가벼운 종아리들

문득 발을 막고 제재소가 나무 켜는 톱질 소리가 들려온다

향국하다 눈을 감는다

거대한 삼나무 숲 속살들이 톱밥으로 무너져내린다

자꼬만 밀림 속에서 휘파람 새 휘파람새가 운다

생각이 발통이 되어 축축한 통나무들을 물고 간다

나무 찍는 우리나라 강릉 크낙새의 빨간 주둥이가 보인다

뚝방길 위 버드나무에 하얀 젖니를 뱉고 가는 봄비는 즐겁다

아, 들길에 서서 나는 명아주 싹이라도 세어볼 건가

강을 건너 북상하는 한 떼의 봄비, 뒤발꿈치가 다 젖는다

오늘은 강가에 나가 남풍에 실려 종종걸음 치는 한 떼의 봄비

조용한 전별식을 갖고 싶다

 

 

   봄비 맞는 두릅나무        문태준

산에는 고사리밭이 넓어지고 고사리 그늘이 깊어지고

늙은네 빠진 이빨 같던 두릅나무에 새순이 돋아, 하늘에

가까워져 히, 웃음이 번지겠다

산 것들이 제 무릎뼈를 주욱 펴는 봄밤 봄비다

저러다 봄 가면 뼈마디가 쑤시겠다

 

 

   봄비에게 길을 묻다       권대웅

봄비 속을 걷다

어스름 저녁 골목길

아직 꽃이 피지 않은 담장 너머

휘파람 소리처럼 휙휙 손을 뻗어

봄비를 빨아들이는 나뭇가지들

묵은 살결 벗겨내며 저녁의 몸바꿈으로 분주한데

봄비에 아롱아롱 추억의 잔뿌리 꿈틀거리는

내 몸의 깊은 골목은 어찌해야 하는 것인지

저녁 여섯 시에 퍼지는 종소리는

과거 현재 미래 한데 섞이고

비의 기억 속에서 양파냄새가 나

빗줄기에 부푼 불빛들

창문에 어른거리는 얼굴들 얼룩져

봄비에 용서해야 할 것이 어디 미움뿐이랴

잊어야 할 것이 사람뿐이랴

생각하며 망연자실 길을 잃다

어스름 저녁

하늘의 무수한 기억 기억 속으로 떨어지는

종아리 같은 저 빗물들

봄비에 솟아나는 생살들은 아프건만

 

 

    봄비 한 주머니       유안진

320밀리리터짜리

피 한 봉다리 뽑아 줬다

모르는 누구한테 봄비가 되고 싶어서

그의 몸 구석구석 속속들이 해돌아서

마른 데를 적시어 새살 돋기 바라면서

 

아냐 아냐

불현듯 생피 쏟고 싶은 자해충동 내 파괴본능 탓에

멀쩡한 누군가가 오염될라

겁내면서 노리면서 몰라 모르면서

살고 싶어 눈물나는 올해도 4월

내가 할 수 있는 짓거리는 이 짓거리뿐이라서

 

 

 

   비옷을 빌려입고        김종삼

온 종일 비는 내리고

가까이 사랑스러운 멜로디

트럼펫이 울린다

 

이십팔 년 전

善竹橋가 있던

비 내리던

開城

 

호수돈 女高生에게

첫사랑이 번지어졌을 때

버림 받았을 때

 

비옷을 빌려입고 다닐 때

기숙사에 있을 때

기와 담장 덩굴이 우거져

온 종일 비는 내리고

사랑스러운 멜로디 트럼펫이

울릴 때

 

 

    양철지붕과 봄비      오규원

 오래된 붉은 양철지붕의 반쯤 빠진 못과 반쯤 빠질 작정을 하고 있는 못 사이

 이미 벌겋게 녹슨 자리와 벌써 벌겋게 녹슬 준비를 하고 있는 자리 사이

 퍼질러진 새똥과 뭉친 새똥 사이

 아침부터 지금까지 또닥또닥 소리를 내고 있는 봄비와

 또닥또닥 소리를 내지 않고 있는 봄비 사이          

     제 49회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피어라, 석유!> 현대문학 2004년

 

 

     연금술           Sara Teasdale

봄이 빗속에 노란 데이지꽃 들어올리듯

나도 내 마음 들어 건배합니다

고통만을 담고 있어도

내 마음은 예쁜 잔이 될 겁니다

 

빗물을 방울방울 물들이는

꽃과 잎에서 나는 배울 테니까요

생기 없는 슬픔의 술을 찬란한 금빛으로

바꾸는 법을

Sara Teasdale(1884-1933) 미국. 개인적인 주제의 짧은 서정시가 고전적 단순성과

차분한 강렬함으로 주목을 받았아. <사랑의 노래>1917년. 퓰리처상 수상.

   

       

      춘흥         정몽주

봄비 가늘어 방울지지 않더니

밤중이라 가늘게 소리 들리네

눈 녹아 남쪽 시냇물 불어나니

새싹들 여기 저기 솟아 오르네

 

 

      함께 젖다 2    윤제림

봄이 오는 강변, 빗속에

의자 하나 앉아 있습니다

의자의 무릎 위엔 젖은 손수건이 한 장

가까운 사이인 듯 고개 숙인 나무 한 그루가

의자의 어깨를 짚고 서 있지만

의자는 강물만 바라보고 앉았습니다

영 끝나버린 사랑은 아닌 것 같은데

의자는 자꾸만 울고

나무는 그냥 듣고만 있습니다

언제나 그칠까요

와락, 나무가 의자를 껴안는 광경까지

보고 싶은데

 

손수건이 많이 젖었습니다

그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