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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조은시와글

봄비 와 애절한 시

 

 

가시랑 비     이동운

    가시랑 가시랑

    가시랑 비                     가시랑비(가랑비) ㅡ

     간질간질 소물소물              이슬비 보다는 조금 굵지만 짧게 내리는 비

    가시랑 비

 

    뒷동산 살구꽃도

    참다 못해 하하하

    앞마을 복사꽃도

    견디다 못해 호호호

 

    가시랑 가시랑

    가시랑 비

    간질간질 소물소물

    가시랑비            

 

 

                     

    그 봄비          박용래

 오는 봄비는 겨우내 묻혔던 김칫독 자리에 모여 운다

 오는 봄비는 헛간에 엮어 단 시래기 줄에 모여 운다

 하루를 섬섬히 버들눈처럼 모여 서서 우는 봄비여

 모스러진 돌절구 바닥에도 고여 넘치는 이 비천함이여

            

         <강아지풀> 민음사. 1975년

 

 

    모란이 이우는 날            유치환

생각은 종일을 봄비와 더부러 하염없어

뒷산 솔밭을 묻고 넘쳐 오는 안개

모란꽃 뚝뚝 떨어지는 우리 집 뜨락까지 내려

 

설령 당신이 이제

우산을 접으며 반긋 웃고 사립을 들어서기로

내 그리 마음 설레이지 않으리

이미 허구한 세월을

기다림에 이렇듯 버릇 되어 살므로

 

그리하여 예사로운 이웃처럼 둘이 앉아

시절 이야기 같은 것

예사로이 웃으며 주고받을 수 있으리

이미 허구한 세월을

내 안에 당신과 곁하여 살므로

 

모란은 뚝뚝 정녕 두견처럼 울며 떨어지고

생각은 종일을 봄비와 더부러 하염없어

이제 하마 사립을 들어오는 옷자라깅 보인다

 

   봄밤의 반가운 비     두보

좋은 비 시절을 알아

봄이 되니 때맞춰 내리기 시작하네

바람 따라 밤에 몰래 숨어들어

소리도 없이 촉촉히 만물을 적시네

들판 길 구름 낮게 깔려 어둡고

강 위에 뜬 배의 불빛만이 밝네

이른 아침 분홍빛 비에 젖은 곳 보니

금관성에 꽃들 활짝 피었네

 

 

  봄비           고정희

가슴 밑으로 흘려보낸 눈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은 이뻐라

순하고 따스한 황토 벌판에

봄비 내리는 모습은 이뻐라

언 강물 풀리는 소리를 내며

버드나무 가지에 물안개를 만들고

보리밭 잎사귀에 입맞춤하면서

산천초목 호명하는 봄비는 이뻐라

거친 마음 적시는 봄비는 이뻐라

실개천 부풀리는 봄비는 이뻐라

 

오 그리운 이여

저 비 그치고 보름달 떠오르면

우리들 가슴 속의 수문을 열자

봄비 찰랑대는 수문을 쏴 열고

꿈꾸는 들판으로 달려나가자

들에서 얼싸 안고 아득히 흘러가자

그때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리

다만 둥그런 수평선 위에서

일월성신 숨결 같은 빛으로 떠오르자

 

 

  봄비           김석전

비가 그쳤네

햇빛이 반짝어리네

세수한 산과 들이

수군거리오

"어이 시원하구려."

"어이 시원하구려."

<중외일보> 1930년 3월 19일

 

 

 

  봄비            김소월

어룰없이 지는 꽃은 가는 봄인데

어룰없이 오는 비에 봄은 울어라

서럽다, 이 나의 가슴 속에는!

보라, 높은 구름 나무의 푸릇한 가지

그러나 해 늦으니 그어 오지만

내 몸은 꽃자리에 주저앉아 우노라

 

 

 

  봄비1          김용택

바람이 붑니다

가는 빗줄기들이 옥색 실처럼 날려오고

나무들이 춤을 춥니다

 

그대에게

갈까요 말까요

내 맘은 절반이지만

날아 온 가랑비에

내 손은 젖고

내 맘도 벌써 다 젖었답니다

 

내 가슴에 묻혔던 내 모습은 그대 보고 싶은 눈물로 살아나고 그대 모습 보입니다

내 가슴에 메말랐던 더운 피는 그대 생각으로 이제 다시 붉게 흐르고

내 가슴에 길 막혔던 강물은 그대에게 가는 길을 찾았습니다

아, 내 눈에 메말랐던 내 눈물이 흘러 내 죽은 살에 씻기며 그대 푸른 모습,

언 땅을 뚫고 솟아나는 모습 보입니다

  

  봄비            김윤배(1944 - )

세상이 빗방울 위에 놓인다

 

겨우내 마른 소리를 내며 떠나려던 나무들이

슬며시 뿌리를 내리고 발등에 누워 젖고 있는

제 그림자를 내려다본다

내, 지난 겨울이 저랬덙가

숲이 빗방울을 조용히 내려서고

오랜 잠 괴로워했던 산갈대

툭툭 마디를 꺾는다

내, 지난 봄이 저랬던가

저처럼 작고 조용한 빗방울에 얹혀

스거운 나이를 버리면

내 굽은 그림자가 끌고 온

메마른 마음 햇솜처럼 부풀어

꽃망울 벙그는 세상을

혼자는 갈 수 있으리

내 비록 네 마음 속에

싹 틔울 꽃씨 하나 묻어두지 못한

붙임의 세월을 살았다 하더라도

 

 

 

  봄비            노천명

강에 얼음장 꺼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 가슴 속 어디서 나는 소리 같습니다

 

봄이 온다기로

밤새것 울어 새일 것은 없으련만

밤을 새워 땅이 꺼지게 통곡함은

이 겨울이 가는 때문이었습니다

 

한밤을 줄기차게 서러워함은

겨울이 또 하나 가려 함이었습니다

 

화려한 꽃철을 가져온다지만

 

이 겨울을 보냄은

견딜 수 없는 비애였기에

한밤을 울어울어 보내는 것입니다

 

 

       봄비       노향림

지난 겨울 누우드로 버티어온 나무들이 유심히 제 몸을 들여다 본다

수없이 많이 튼 살갛을 아프게 때리는 빗줄기,

한때 농익은 열매 매달고 놀던 무성생식의 까만 젖꼭지를 퉁겨본다

어디서 보았을까

몇채의 집들이 들판에서 등 돌려 앉는 것을

쑥대머리들이 귀를 쫑긋거리고 키를 늘인다

온종일 속옷이 벗겨진 하늘에선 미처 피신하지 못한 바람들만 산발한 채 뛰어다닌다

 

스스로 물소리를 만들며

흘러가는 비, 비

 

 

   봄비2           노향림

빠르게 흐르는 빗줄기

라일락이 밥알 같은 꽃을 매단 주위는 온통 환했다

묵은 김칫독을 들어낸 구덩이에는 겨울의 긴 뿌리가 언 채로 드러났다

채 녹지 않은 꿈이 바닥까지 내려갔다가 끌려나온 흔적

이름 없는 나무들의 저 빈 가지 끝 숱한 얼굴 속 어디에 단발머리 중학생 시절의 내가 있는지

사진첩을 펼친 듯 봄밤이 환히 어두워져 온다

 

 

 

  봄비          박영근

누군가 내리는 봄비 속에서 나직하게 말한다

 

공터에 홀로 젖고 있는 은행나무가 말한다

 

이제 그만 내려놓아라

힘든 네 몸을 내려놓아라

 

네가 살고 있는 낡은 집과, 희망 주린 책들,

어두운 골목길과, 늘 밖이었던 불빛들과,

이미 저질러진 이름,

오그린 채로 잠든, 살얼음 끼어 있는

 

냉동의 시간들, 그 감옥 한 채

기다림이 지은 몸 속의 지도

 

바람은 불어오고

먼데서 우레 소리 들리고

길이 끌고온 막다른 골목이 젖는다

진창에서 희미하게 웃고 있는 아잇적 미소가 젖는다

빈방의 퀭한 눈망울이 젖는다

 

저 밑바닥에서 내가 젖는다

 

웬 새가 은행나무 가지에 앉아 아까부터 나를 보고 있다

비 젖은 가지가 흔들린다

새가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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