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시를 쓰는 남자
(사진:최인수)
서정시를 쓰는 남자
- 이기철 -
바람타는 나무 아래서 온종일 정물이 되어 서 있는 남자
정물이 되지 않기 위해 새들은 하늘로 날아오르고
무너진 건물 사이에서 고전적인 늑골을 들고 서 있는 남자
벽돌집 한 채를 사기에는 형편없이 부족한 시를
밤 늦게까지 쓰고 있는 남자
아파트 건너집 주인 이름을 모르는 남자
담요 위에 누워서도 별을 헤는
백리 밖 강물 소릴 듣는 남자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개울물에 발이 빠진 남자
주식시세와 온라인 계좌를 못 외는 남자
가슴 속에 늘 수선화같은 근심 한 가닥 끼고 다니는 남자
장미가시에 찔려 죽을 남자
거미줄 같은 그리움 몇 올 바지춤에 차고 다니는 남자
민중시인도 동서기도 되기에는 부적합한 남자
활자 보면 즐겁고 햇살보면 슬퍼지는 남자
한 아내를 부채로만 살아가는 남자
가을강에 잠긴 산그늘 같은 남자
버려진 빈 술병같은, 지푸라기 같은 남자
서정시를 쓰는 남자
(사진:최인수)
우리는 꿈 꾸는 자
찢어진 신문지 한 장 바람에 날리는 것을 보고도
나는 내 생애의 반쪽이 뒤척이는 것을 보았네
우리는 모두 꿈 꾸는 자
꿈 꾸면서 눈물과 쌀을 섞어 밥을 짓는 사람들이네
오늘 저녁은 서쪽 창틀에 녹이 한 겹 더 슬고
아직 재가 되지 않은 희망들은
서까래 밑에서 여린 움을 키울 것이네
붉은 신호등이 켜질 때마다 자동차들은 멎고
사람들은 하나씩 태어나고 죽네
우리는 늘 가슴 밑바닥에 불을 담은 사람들
꺼지지 않은 불이 어디 있을까마는
불 있는 동안만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이네
발 뒤꿈치에 못이 박혀도
달려가는 것만이 우리의 숨이고 목숨이네
우리는 꿈 꾸는 자
쌀을 섞어 밥을 짓는 사람들이네
(사진:최인수)
생의 노래
(사진:최인수)
오막살이 집 한 채
|
(사진:최인수)
이웃에게
오늘 우리가 걸어온 길가에는
이름 없는 들꽃이 피었더군요
내일 우리가 걸어갈 들판에도
이름 숨긴 들꽃이 피겠습니까
먼길 걸어 지친 자의 문간에도
절망의 가루를 털며
어제와 다른 하루를 몰고 오는
아침은 열리겠습니까
문득 길가에 넘어진 고목등걸에 앉아서도
짧은 울음을 남기고 죽은 사슴처럼
참혹하게 깨우치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거친 나무껍질도 유순해지는 넉넉한 밤이
이불로 덮여오기를 바라기에는
지은 죄가 너무 무겁다 하겠습니까
모난 돌멩이들이 밀알같이 부드러워지는 저녁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형벌입니까
오늘 우리가 바라본 하늘에는 별이 푸르더군요
내일 우리가 바라볼 하늘에도 별이 푸르겠습니까
'조은 시와 글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봄이오면... (0) | 2009.04.09 |
---|---|
봄의 예찬 (0) | 2009.04.09 |
[스크랩] 나를 닦는 백팔배 (0) | 2009.03.31 |
[스크랩] 마음의 눈을 떠라 (0) | 2009.03.31 |
삶이라는 잘 차려진 밥상 (0) | 2008.08.19 |